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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애산 김진호의 민족운동 A Study on National Movement of Aesan Kim Jin-Ho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규무
논문정보
Publisher
한국민족운동사연구
Issue Date
2017-06-01
Keywords
-
Citation
-
Source
-
Journal Title
-
Volume
Number
91
Start Page
43
End Page
74
DOI
http://dx.doi.org/10.19162/KNM.91.2017.6.02
ISSN
1226-9980
Abstract
이 논문은 김진호의 민족운동을 신민회와 상동청년학원, 그리고 3ㆍ1운동과 관련하여 살펴본 것이다. 그는 경북 의성의 빈한한 양반가문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했다. 1899년 상경한 그는 이용태의 문객이 되어 입신양명의 기회를 찾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과 민영환의 순절에 자극받고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를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6년 경북 의성에서 세무주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1907년 면직되어 다시 상경했고, 같은해 전덕기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에 적극 투신했다. 그는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했으며, 상동청년학원에서는 역사과목을 담당했다. 그 시기는 1908~1909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를 전후하여 그는 전덕기ㆍ이동녕의 권유을 받아 임치정의 집에서 양기탁에게 문답을 받고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입회했다. 신민회에서 그는 지방과의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상동청년학원이 신민회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여겨진다. 1913년 상동청년학원이 폐원되자 그는 배재학당(이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한문과 성경을 담당하며 근무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정동교회 목사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인 이필주의 요청을 받고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학생들을 통해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으며, 그 자신이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고,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전달하여 가두에서 배부하도록 독려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상동청년학원과 신민회를 통한 민족운동이 3ㆍ1운동으로 계승ㆍ발전되는 전형적인 사례를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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