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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18 민중항쟁과 광주ㆍ전남지역 개신교계 A Study on the May 18 Civil Resistance and Protestant Christians in Gwangju and Chonnam Province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규무
논문정보
Publisher
한국기독교와 역사
Issue Date
2012-09-01
Keywords
-
Citation
-
Source
-
Journal Title
-
Volume
Number
37
Start Page
181
End Page
209
DOI
https://doi.org/10.18021/chk..37.201209.181
ISSN
1598-7256
Abstract
1980년 5·18이 일어나자 광주의 천주교·개신교 인사들은 계엄군의 발포 이튿날인 5월 22일 남동성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성당파’라 불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며, 개신교 목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같은날 도청에서 모인 이른바 ‘도청파’ 중에는 몇 명의 개신교 목사가 참여했다. 사태의 수습방안을 놓고 대체로 ‘성당파’는 강경, ‘도청파’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는데, 그 때문에 양측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5월 25일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를 함께 구성하여 활동했다. 이 위원회 위원 25명 중 적어도 1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광주의 개신교 교역자들은 5월 23일 15개 교파가 참여한 광주시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같은 달 26일 이를 광주시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로 개칭하고 구호활동에 중점을 둔 활동을 벌였다. 한편 전남 목포에서는 기장측 목사와 목포NCC가 중심이 되어 5월 25일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를 열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밖에 영암읍교회ㆍ강진읍교회ㆍ해남읍교회 등에서도 시위대에게 음식·의복 등을 지원하며 항쟁에 동참했다. 5·18 당시 기독교계가 입은 피해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렵다. 하나의 방편으로 국립5·18묘지에 안장된 ‘유공자’ 670명의 묘비 중 십자가나 세례명이 있는 것은 136건이다. 이들 중 21명이 5·18 기간 중에, 25명이 1980년대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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