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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공업교육(1903~1913)
Industrial Education of the Hwangseong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1903~191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규무
논문정보
- Publisher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Issue Date
- 2024-09-01
- Keywords
- -
- Citation
- -
- Source
- -
- Journal Title
- -
- Volume
- Number
- 120
- Start Page
- 5
- End Page
- 34
- DOI
- ISSN
- 1226-9980
Abstract
1903년 창설된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공업교육 전문가인 그레그의 주도로 1906년 청년학관에 ‘공예교육과’를 설치하면서 공업교육을 시작했다. 이를 전후하여 이상재·최병헌·최상호 등 청년회 인사들은 신문기고를 통해 공업교육을 통한 ‘공업부국론’을 주장했고 신문사설에서도 이에 호응했다. 더불어 청년회에서는 연설회·환등회 등을 열고 공업교육을 강조했다. 청년회 임원인 서양인 그레그·브로크만·터너 등도 이를 적극 추진하면서 청년회의 공업교육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청년회는 YMCA 국제위원회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1906~1908년 공업교육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시설을 구비했으며, 이는 당시 사립교육기관으로는 드문 사례였다. 공업교육부서의 명칭은 자료에 따라 ‘공예교육과’·‘공업과’·‘공업부’·‘공예부’·‘산업부’ 등으로 달리 나오는데, 그 산하에 철공과·목공과·사진과·제화과·인쇄과 등이 설치되었다. 입학자격은 15~16세 이상의 남자였고, 시험과목은 국학문·독서·작문 및 산술·사칙이었으며, 수학기간은 학과에 따라 1~3년이었다. 그리고 제품을 제작·판매한 학생에게는 수학기간을 기준으로 급여가 지급되었다. 1907~1914년 공예과 재학생·졸업생의 연간 추이를 보면 재학생은5~49명, 졸업생은 6~41명으로 편차가 작지 않았다. 1909~1914년의 수입·지출 역시 매년 적자였다. 1916년부터는 호전의 기미를 보였으나, 적어도 ‘황성기독교청년회(1903~1913)’ 시기에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청년회의 공업교육 목적은 전문인력의 양성이었기에 수익성만으로 그 성패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한국인의 육체노동 천시사상을 혁신하는 데 성공”했고, “광범위한 민중적 뿌리를 내리게 되고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전국 각지에 공업교육기관이 설립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청년회 공업교육의 의의라고 할 것이다.
- 광주대학교
- KCI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저자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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